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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2009
참여작가 정만영
전시기간 2009 2.28(sat)~3. 29(sun)
 
"Are You Ready?" 정만영 개인전 (Jeong, Man-young Solo Exhibition with sound performance: 2/28-4/30, 2009)



SOUND CUBE 1.5
사운드 퍼포먼스 -그림 그리는 기계
2009 2.28(sat)~3. 29(sun) 
퍼포먼스: 2. 28. pm 5 부터 ~ 
장소 :오픈스페이스 배 전시동 넓은 마당.
기록전시: 3.3부터 

연장전시 : ~ 4.30(thu)까지.

구성
그림 그리기: 굴삭기(일광중기)
영   상: 이광기(영상작가)
사   진: 이인미(사진작가)
녹   음: 정만영
크리틱: 사운드 아트 (심준섭-작가)
           서문 (서상호-오픈스페이스 배 디렉터)
           미술비평(김만석-미술평론가) 
           건축적 비평 (홍순연 – 건축학 박사)
  

# 전시에,
사진, 회화, 영상, 사운드아트, 비평, 설치, 퍼포먼스 등 여러 장르의 매체를 통해 하나의 전시를 만드는 기획전.

# 전시 이전에,
1. 愛憎 
愛와 憎의 사이에서 생각한다. 

2. 都市
  물질적 풍유함과 편리함의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도시 개발과 함께 환경문제를 같이 고민한다. 

3. Total multimedia life.
  일본 동경 아키아바라의 요도바시카메라라는 큰 전자상가 건물에 들어가면 수많은 미디어 제품들과 용품들로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다. 한편 입구에, 매장 곳곳에, 종이 쇼핑백에 ‘Total multimedia life yodobashi camera’라고 적혀 있다. 이제 미디어라는 말도 불충분해서 멀티미디어다. 미디어 속에서 즐기고 미디어를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나는 또 다시 애증관계 속에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미디어에 대한 비판 또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 나의 발견, 그 것이 미디어에 대한 愛이고 憎이다. 
  컴퓨터라는 매체를 이용한 작품을 함에 있어 급변하는 사양과 소프트웨어처럼 어제 최고의 컴퓨터는 오늘 낡은 컴퓨터로 전락해 버리는 것처럼 컴퓨터 매체를 이용한 작품들 또한 낡은 모델이 되어 계속해서 재탕되고 복제된다. 미디어아트에 결별을 선언하든 비판적 시각으로 컴퓨터 매체를 적극 이용하든 애증관계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매체는 어디에 있고, 누가 생산하고 소비하고 있는가?
중심도 없고 연결의 고정된 법칙도 없이 수평적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구조 속에 미디어가 존재하고, 그 속에서 누구나 사용하고 누구나 생산하며 소비한다.  살아 꿈틀거리는 대안은 애증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기계와 도시와 인간과 자연, 물질과 개념을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로 연결시키는 것이 예술이라는 매체이다. 

4. Sound + Cube
소리는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예술이 있기 이전부터 있었던 자연의 메시지 이다.   다시 말해서 진동은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생명과 같은 것이다. 
  흔히 말해지는 공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평적 네트워크 구조와 시간이라는 수직적 네트워크 구조가 만나는 곳만 있을 뿐이다. 
   예술이 그 중간영역에 위치하는 것이라면 그 영역의 폭도 정해지지 않으며 경계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미술에 있어서 어디까지 미술이고 무엇이 미술인가라는 물음은 할 필요도 없으며 해도 이미 그 가치는 허무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영역들과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어디까지 미술이고 무엇이 미술이다라는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구분하지 않으면 안달이 나 버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다. 
미술, 예술은 어디를 보아도 그 위치는 중간영역인데 그 것을 생산하는 그 자신은 과연 어디에 기울어져 있을까? 당연히 내가 설 위치도 관찰자의 위치, 중간자의 위치여야만 한다. 

5. 現場性
시간의 바다, 소리의 바다에서 좋은 소리 좀 낚아보려고 하고 있다. 

 퍼포먼스를 마치고 전시로 들어가며.


‘기계’ 언어

김만석(미술비평가)

  정만영이 기획한 퍼포먼스 작업에는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가 가로질러 간다. 핵심적으로 퍼포먼스는 ‘기계’에 의해 생산되는 미술의 가능성을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의 종언’을 고했던 단토(A. C. Danto)의 입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굴삭기에 붙여진 붓으로 도시를 그리고 그 과정을 사운드로 담아내는 것, 그것을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 또 비디오로 촬영하는 것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이 퍼포먼스에서 인간은 조작의 위치에 있기는 하지만, 그 역할은 그리 중요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굴삭기를 조작하는 주체는 분명 인간이고 그것을 그리는 것 역시 인간이지만 인간 행위는 실제로는 기어와 조작대의 상하좌우의 운동으로만 나타나며 실제적인 조작은 굴삭기에 내맡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굴삭기로 땅을 파는 행위를 보고 있을 경우에 ‘굴삭기가 땅을 판다’고 말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말하자면, 굴삭기‘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굴삭 기‘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계의 능력에 의해서 가능해진 행위이므로 이 퍼포먼스의 주체는 ‘기계/굴삭기’이고 거기서 생산된 언어는 인간의 조형언어가 아니라 기계언어라는 것이다. 하여, 인간에 의한 조작 자체가 불필요해질 경우에, 기계(혹은 로봇)에 의한 예술이 반드시 불가능하다고 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것. 더 이상 예술이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담지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를 보존하고 기록하는 것도 모두 또 다른 ‘기계/미디어’라는 점에서 인간지각 능력의 한계를 ‘조건’으로 삼아 이루어지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기계의 인간화가 아니라 인간의 기계화라는 관점에 이 퍼포먼스가 위치해 있다고 해야 할까? (혹은 퍼포먼스의 작가가 누구인지 물을 수 없는 것도 이런 점에 근거한다. 더군다나 인간이 포착할 수 없는 시간을 기계와 미디어가 대리하여 포착하려는 것 역시 인간주체가 기계/미디어에 비한 상대적 무능력을 의미하므로 거기에서 위대한 ‘작가’의 아우라가 들어설 장소는 없다. 기계와 접촉한 인간지각의 ‘기계지각’으로의 변경!) 물론 여기서의 ‘기계’는 MB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굴삭기 정책에서 요구되는 삽이나 불도저 따위의 그러한 기계는 아니며, 또한 기계화라는 단어에 묻어 있는 인간 ‘소외’나 ‘고독’ 따위의 문제와는 다르다는 점은 분명하니 오해가 없어야 하겠다. 아니, 퍼포먼스에서 확인했듯 굴삭기는 ‘땅만 파는’ ‘기계’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기라도 해야 할까?


Sound Cube - 정만영 展  

(심준섭/사운드 작가)  

  동시대 사운드 아트의 특징은 컴퓨터와 기술적인 여러 첨단 장비들로 인해 음향의 질감을 기호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방식으로부터 디지털 방식으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런 디지타이징(Digitizing)의 도움으로 청각적 이미지의 시각적 전이와 촉각적 이동을 비롯한 모든 감각코드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소리의 녹음과 재편집을 비롯한 소리에 대한 모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조작과 실험이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서 사운드 아트의 향방도 다른 면을 맞고 있지만, 현재에는 이런 첨단 장비에 기댄 고도의 인공적인 사운드 아트와 함께 여전히 수공성이 강한 사운드 아트가 공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술과 기술과의 연계성이 비교적 강한 장르적 특수성으로 인해 사운드 아트는 각종 첨단멀티미디어를 흡수하면서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운드 아트의 시기는 이런 첨단의 멀티미디어와 함께 예술과 기술과의 연계가 일반화된 최근에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기술과의 만남에 있어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경향을 구분해야 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술로부터 출발된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효과를 생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려되는 것은 -그것은 모든 다른 영역에도 적용된다. 기술적인 기초단계에서 기술이 남용된다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기계기술의 사소한 기능에 놀라 감격하거나 새로움이라는 것의 환상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이른바 기술적인 진보에만 사로잡혀 그것들을 넘어서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한다.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기술의 가능성에 대한 맹목적인 것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위험성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을 서로 연결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 충분히 재고 할 수 없어진다는 것이다. 저마다에게 선행되어야 할 상호 소통 가능한 논쟁들은 지금까지의 예술적인 경계를 해체하기 보다는 과잉되고 반복되는 것에 치중된 싸구려 기술의 효과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할 수 도 있다. 사운드 아트를 통해, 특정한 역사적 장소적 특징을 가진 소리들을 많이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소리를 담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소리 찾기에 투여하고 있다. 작가에 의해 담겨진 소리는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고, 관객은 소리를 통해 공간 속의 작품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 공간자체의 전이를 경험하게 된다. 소리의 역사성, 장소성을 느끼거나 담겨진 소리의 순수한 공명을 통해 청각이 우선된 시각을 스스로 끌어내는, 익숙하지 않은 예술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모노그래프'  3m 이내 설치  혼합재료 2009


  정만영은 감성적 작업을 진행해온 작가다. 사운드 큐브라는 퍼포먼스 역시 그의 내면적 감성을 느낄 수는 있었다. 중장비 기계가 흰 천위에 그림을 그리고 작가는 그사이 공간에서 형성되는 기계음, 자연음, 사람소리, 그림을 그리는 소리가 강태공이 낚시대를 드리우듯 소리를 낚아보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하지만 현장의 소리공간은 누구나 일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소리인데 그러한 공간의 소리를 정만영은 어떻게 사운드 아트라는 매개로 다시금 그의 감성을 들을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해 진다.이번 전시를 보며 흥미로웠던 것은 퍼포먼스 형식을 취한 사운드 채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새로운 형식의 예술체험에 쉽게 익숙해지는 관객에 대해 소리보기의 변화 즉, 의미가 부여된 소리의 청각적 형식을 어떠한 방법론으로 작가 정만영은 풀어갈 것인지, 앞으로의 작가적 해석을 동료 작가로서 기대해 본다.  


사이를 낚다!
                                                  
서상호  (오픈스페이스 배 디렉터)
                                         
  포클레인(굴삭기)이란 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이다. 건설장비중 단연 으뜸이다. 그 녀석의 체형 또한 다양하다. 무게 800kg 정도의 작은 놈부터 700톤을 훌쩍 넘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하다.  건설현장에서 주역이 되는 그 놈이 오픈스페이스 배 전시공간에 나타난 것이다. 보통 건설 현장에서 볼 수 있는 02,06,08,10 정도인데 오늘 등장한 녀석은 02로서 작은 녀석에 속한다. 굉음을 내며 미리 준비된 화폭에 이 녀석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능숙한 솜씨로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듯 빌딩들을 하나씩 만들어낸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섬세한 솜씨다. 

  준비된 카메라는 포클레인이 예능 프로 주인공이라도 된 듯 여러 각도에서 잡아내고 카메라 셔터는 끊임없이 정지화면을 찍어댄다. 그 사이 작가 정만영은 녹음 장비를 둘러매고 분주히 소리들을 하나씩 담아낸다. 포클레인의 기계음, 주변 사람들, 배 밭에 펼쳐진 자연의 소리가 이렇게 30분 정도 연출된다. 

  정만영은 조각을 전공하였고 설치, 무대, 영상 등 표현의 구애 없이 다양한 작업들을 보여 왔다. 늦깎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그가 2년 만에 본인이 직접 만들고 참여했던 공간 오픈스페이스 배에서 ‘sound cube 1.5’라는 제목으로 우리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평소 노동의 현장을 몸소 즐기는 터였던 바, 이번 작업으로 노동의 신성함을 첨단장비를 통해 배가 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포클레인은 철거 현장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중장비다.  근간 회자되고 있는 단어들 ‘재개발’‘용산참사’‘뉴타운’ 등의 사회적 배경으로서의 문제의식 아래 도시의 무분별한 개발을 고발하는 것일까? 그래서 육중한 덩치에 붓을 매달아 도시의 풍경들을 그려나간 것인가! 작가는 미세한 소리까지 담아내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미처 느끼지 못한 소리들까지 다가가 하나씩 낚아서 새로운 조형언어로 담아내려고 하고 있다. 그 언어들을 고스란히 담아 전시장으로 옮겨 오는 것이다. 굴삭기는 영상을 통해 계속 그림을 그어대고, 기계음은 스피커를 통해 하루 종일 울려 나온다. 


근간의 작업들을 보면 도시의 구조물에 대한 탐닉을 엿볼 수 있다. 무수히 많은 빌딩을 수 천 개 반복적으로 만들어 거대한 성을 쌓기도 하고 바닥에 펼쳐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는 생성된 사물이 아니라 과정의 상황들을 6명의 예술가와 함께 사운드와 영상 그리고 텍스트로 기록하고 있다. 자신만의 소통의 방식으로 그의 속내를 더 많은 사람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고 있다.  작금의 시대를 굴삭기의 착한 모습으로 읽어 주기를 작가는 슬쩍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사이에서 예술과 사회의 미묘한 틈새로 유도한다. 무엇이 먼저라고 나서지는 않지만, 이내 눈치채 버릴 수 있지만, 그래도 예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사회와의 관계를 간과해서는 그 사이를 들을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술에 의한 공간
                                                         
홍순연(건축학 박사)

  건축(建築, Architecture)의 의미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Archi+ Tecture(Archi + Teckton)로서 으뜸이 되는 기술, 가장 기본적인 기술에서 출발한다.  그 중‘Teckton-기술’은 바로 인간의 손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고, 조작하고, 담는 작업이며 한정된 기술이 아닌 예술을 비롯한 모든 인간의 행위자체이다. 이를 바탕으로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만드는 행위를 반복하여 건축이 되어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간과 함께 순환되고 있다. 

  정만영 작가의 작업에는 몇 가지의 도구가 출현한다. 자연, 흰 천, 색(검정과 파랑), 포클레인이 그것이다. 

  자연은 배경이다. 아마도 배경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공간일 것이다. 흰 천은 영역이다. 이는 인간의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인간이 자연과 경계 짓기 위해 만들어놓은 도시와 같은 틀일 것이다. 그리고 색은 가늠할 수 없는 공간과 가늠하는 공간인 자연과 도시를 상호 모방하는 도구이다. 여기에 인간의 손을 대신하는 포클레인이 등장하여 공간을 만들고 나아가 도시를 만드는 기술이 된다. 
  이러한 도구를 이용하여 자연에서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획하여 공간을 하나 만들고 다시 땅을 분화시켜 또 공간을 만들고, 분화된 땅에서 건물의 틀과 층을 나누어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 결국 이 도구들이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이는 공간으로 표현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실루엣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소리가 더해진다. 
  포클레인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비디오와 카메라와 오디오를 가진 이들이 한정된 공간적 행위에 구애받지 않고 아래로, 위로, 멀리서, 가까이서... 서로를 관찰하고 있다. 
  소리는 어느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일상과 움직임의 경계를 파괴하면서 이 둘의 요소를 흐려놓고 있다. 결국 소리에 의존해서 공간을 보게 되고, 공간을 보면서 소리를 듣게 되면서 장면들을 모호하게 만들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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