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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2007
참여작가 이욱상
전시기간 2007. 3. 03(토) ~ 3. 22
전시정보 전시오픈_ 2007. 3. 03(토) 오후 6시 전시장소_ 오픈스페이스 배
 
"Are You Ready?" 이욱상 개인전 (Lee Wook-Sang solo exhibition)

 
- 은밀한 시간을 붙잡는 공간 -

  세르게이 에이ㅉㅔㄴ슈타인은 영화가 억압받고 고통받는 노동대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저 아메리카의 위대한 영화인인 그리피스가 <국가의 탄생>에서 보여준 새로운 영화문법을 막 이상적 국가가 실현된다는 기대로 부풀었던 황량한 러시아에 도입하여 영화의 ‘몽타주’가 궁극적으로 무엇에 도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서로 낯설고 이질적인 두 이미지를 충돌시키고 결합하여 한 세계의 실상을 재현한다는 이 발상은 놀랍기 그지없는 양식으로 다가왔고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재현하고 인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몽타주는 복잡하게 변화해가는 근대자본주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인 방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 고다르나 튀르포 등등 수많은 영화에 의해 몽타주는 쇄신되고 진전하지만, 그 영화언어들이 개입하고자 한 현실은 더욱 가혹하게 대중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왔을 뿐 그러한 현실은 전혀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화든, 미술이든 몽타주를 방법이나 원리로 사용할 때는 몽타주에 대한 치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만 한다. 몽타주가 근본적으로 상이한 시간과 공간을 충돌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이질적 요소가 새로운 하나의 이미지나 상으로 수렴하거나 봉합될 경우 몽타주가 지닌 본래적인 혁명적 힘을 잃을 염려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욱상의 작업은 충돌하는 이질적 이미지를 다루는 몽타주의 현재 지점을 바라보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 이욱상은 ‘나무’의 다양한 변용을 추적하면서 ‘나무’라는 본래적 이미지와 변용된 이미지를 충돌시킨다. 나무라는 형상에 붙어 있는 다양한 나무의 변용된 결과들이 나무의 밑둥에서부터 가지에 이르기까지 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무는 나무이되 더 이상 나무로 존재하지 않고 새로운 의미망을 향해 열려 버린다.

  하지만, 나무는 여전히 나무로 지각되고 있고 ‘나무’의 실체는 변용된 결과들과 더불어 변증법적으로 완결된 이미지로 지향되지 않는다. 나무와 나무의 변용들은 말 그대로 공존하고 있으며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지우지 않고 도리어 더 강한 힘으로 몽타주에 저항하는 듯한 모양새로 우두망찰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무라는 실체를 매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무는 온전하고 일관된 제 정체를 유지하기 어렵고 나무가 이미 여러 정체성과 조합된 결과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해줄 따름이다. ‘아들’―‘엄마’―‘할아버지’의 사진을 제시하고 각각의 사진 이미지에서 부분을 떼어내고 그 부분을 세 명의 얼굴에 교차하는 작업도 ‘나무작업’의 연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세 명의 각각 개별적 ‘얼굴’은 독립적이지만, 사실 상 이들 세 얼굴은 완전히 독립적이라기보다 서로를 함축하고 있는 얼굴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세 얼굴은 독립적이되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형상으로 표현된다. 이욱상에게 하나의 존재는 뜬금없이 세계에 등장한 게 아니라 관계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결과에 주목하지 않고 과정에 주목한 결과로 파악된다. 과정은 근원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 얼굴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과정과 흐름이 요구될 수밖에 없으므로 이 과정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얼굴의 부분을 떼어내고 붙여야만 시간의 과정과 흐름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 얼굴은 동일한 얼굴이지만, 전혀 동일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서로의 얼굴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경로에 놓이게 된다. 한 존재의 시간이 다른 존재의 시간과 접속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욱상은 몽타주를 인식의 문제에서 존재의 문제로 이행시키려는 무의식적 노력이 녹아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든다. 몽타주는 이미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장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공간에서 시간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도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 아니, 차라리 모든 사물은 항상-이미 몽타주이지만, 하나의 존재를 보완하고 결핍을 충족시키는 보충적 지위의 존재는 은폐되어야 한다. 시간을 견딘 한 사물이 자리를 이동할 때, 혹은 시간의 흐름을 견딘 사물이 사라지거나 마모될 때 혹은 시간의 과정에서 변화를 겪거나 변형될 때 시간은 흔적으로 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은폐를 극복하는 힘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그 변화와 변형의 결과가 노출된 공간은 인과적이고 계기적인 시간이 아니라 상이한 시간 질서가 하나의 공간에서 웅성거릴 때, 동일자로 수렴되는 이미지는 파열되고 은밀하게 숨 쉬고 있던 시간들이 얼핏 솟구쳐 오른다.

  그림자의 자리에 있거나 침묵의 형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미술이 지닌 윤리적 지평의 한 형식일 수 있다. 이욱상의 작업에 녹아 있는 따뜻한 시선도 어쩌면 방법이 부여한 윤리적 명령에 충실하게 뒤따라서일 터이다. 물론 이욱상의 저 따뜻한 눈길은 아직 표면적인 층위에만 머물러 있다는 혐의를 완전히 불식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연과 문화를 결합시키고 세 얼굴을 이어붙이는 작업은 한편으로는 너무 익숙해진 형식이고 주제를 전달하는 힘도 너무 헐거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욱상이 구성하는 관계는 너무 근친적이어서 그것들에게 윤리성을 보존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근친이라는 내부가 아니라 바깥과 외부를 상상하는 힘이 더 보태어 지지 않는다면, 그의 조형언어가 ‘도덕’에 국한될 여지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가 진행해온 두 번째 전시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가지를 채득했다는 데에서 기대를 갖게 한다. 알게 모르게 그가 시간을 사유하고 있다는 것. 아직은 미약하지만, 그가 타자의 시간에 자신의 몸을 허여하게 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가 무척 궁금하다는 것. 그래서 어떤 조형언어로 그가 세계를 표현하려 하는지가 기대된다는 것. 따뜻한 저 눈빛이 어떻게 날카로워지면서도 따뜻해질지가 기다려지는 것. 어쩌면 딱딱한 인식 대신에 생명에 눈길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 조금 더 근본적인 층위와 맞닿아야 한다는 것. 삶을 파괴하고 하나의 삶을 짓밟는 힘들에 대해서도 통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 혹은 그가 바깥이 되는 것. 서둘러 말해야겠는데, 그의 세 번째 전시에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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